사상 및 철학

장자와 노자의 철학

사이코 킬러 2009. 9. 16. 19:49

장자와 도가철학, 그리고 장자

 

 

         강 대 웅

 

 

 

 

목차

 

1. <장자>라는 책과 장자라는 인물

1-1. 장자라는 인물

1-2. <장자>라는 책

 

2. 장자의 도道

2-1. 장자가 본 인간, 인간의 도道

2-2. 장자가 본 사회, 사회의 도道

 

3. 노자 철학과 장자 철학은 같은가?

3-1. 노자와 장자의 공통점

3-2. 노자와 장자의 다른점

 

4. 장자 사상의 핵심 <소요유> <제물론>



1. <
장자>라는 책과 장자라는 인물

 

 1-1. 장자라는 인물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인 장자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 춘추시대의 양나라 혜왕, 제나라 선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오늘날 중국 허난성 상치우시 동북 지역으로 추정되는 송나라 몽蒙 이라는 지역에서 칠원리漆園吏라는 관직을 지냈다는 설이 있다. 칠원리는 귀족 소유의 산림을 관리하는 작은 관직이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재상을 맡아 달라고 요청 하였으나 ‘진흙투성이의 개천에서 사는 물고기 신세가 될지라도, 나라를 가진 사람에게 속박당하며 살고 싶지 않다’며 거절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장자는 눈앞의 욕망이나 얕은 지식, 입신양명 등을 조소하였다.  

장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 전국시대의 사람이다. 자신을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제왕들을 도와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민중들은 착취당하고, 전쟁에 동원되어 죽어 갔으며, 살아남더라도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제왕들을 도왔던 사상가들은 자신의 지혜의 대가로 보상을 받고 새로운 지배 계급을 만들어 나갔다. 장자는 이러한 전란이 휩쓸고 간 황폐한 땅 위에서 실망과, 반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우리 삶의 괴로움과 끊이지 않는 이러한 안과 밖의 분쟁을 큰 시각으로 바라보고 초월할 것을 이야기한다. 한 인간으로서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나, 자연의 힘을 바꾸거나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자의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이라는 우화에 이러한 장자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승리를 얻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싸우는 두 나라의 전쟁은, 사실 광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달팽이의 왼쪽 더듬이에 있는 촉나라와 오른쪽 더듬이에 있는 만나라가 싸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자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는 말로 노자와 한데 묶여서 생각되어 질수도 있으나 장자의 도()는 노자의 도와 차이가 있다. 노자의 도는 보편적인 원리로 작용하며 거기에는 목적이나 의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제도나 질서는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위를 배격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며, 욕심을 버리고 작은 나라에서 작은 국민으로 살 것을 이야기한다. 그의 정치 및 교육사상이 모두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장자는 노자의 이러한 무위자연, 소국과민의 이상을 계승 하면서도, 큰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차별이 없다는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장자의 도에 따르면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시비(是非)의 차이도 없다. 만일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것에 연연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즉 장자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2. <장자>라는 책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장자>는 장자보다 600년 후의 위진시대 사람인 곽상郭象이 정리한 것으로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 등 모두 33 6466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곽상보다 앞선 서기 1세기 사람인 역사가 반고가 지은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에는 <장자>가 내편 7, 외편 28, 잡편14, 해설 3편으로 총 52편으로 이루어 졌다고 전하며, 사마천의 사기에는 장자가 10만언을 썼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장자는 약 1/3 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송나라 학자 임운명은 내편 7편은 장자가 쓴 것으로 보이지만 외편은 내편과 달리 주제가 없는 글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작성 하였다고 보았고, 명말청초 학자 왕부지는 외편에는 본인의 글이 아닌 위서가 많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내편 중에서도 ‘소요유’ ‘제물론’ 두편만이 장자가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따라서 <장자> 장자 본인이 작성한 것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동안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글들이 합쳐진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외편과 잡편은 후학들에 의해서 쓰여진 장자학파 논문집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장자 철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천하’편은 선진 시대 여러 학파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어서 당시 학술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언’寓言편에는 장자의 문체에 대해 설명한 글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장자>는 우언寓言과 중언重言 치언巵言 으로 되어있다. 우언은 사람과 사물에 비유하여 주장을 펼친 것이고, 중언은 당시 사람들이 존중하던 사람의 권위에 의탁하여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치언은 사람과 사물과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에 맞게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자연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자>는 유가와 묵가 및 당시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한다(양비론). 그는 피지배 하층민의 입장에서 이러한 논쟁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온전한 삶’에 대한 욕구를 저해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당시 학계와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결론은 결국 피지배 하층민에게 있어서는 질곡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자>의 인식론은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 만나 선종禪宗에 영향을 주었으며, 도교에서는 장자를 남화진인이라는 이름의 열선列仙으로 추앙하였고,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높여 부르며 도교의 경전으로 삼았다

 

 

2. 장자의 도道

 

장자는 우리 인간이 사는 현상계의 본질은 변화라고 생각 하였다. 만물은 한순간도 그칠 사이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변화한다. 장자는 모든 변화의 근원인 동시에 일체의 변화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도道 라고 생각하였다.

 

장자(내편) : 6편 대종사(大宗師)

무無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마음으로 느껴 얻을 수 있어도 감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으로, 천지개벽에 앞서 존재했다. 귀신도 상제上帝도 하늘도 땅도 그 연원은 모두 도이다

夫道, 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도는 사물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 도를 통해서 세상을 보면 일체의 구별이 없어진다. 일체의 구별이 없는데 전쟁이나 지식, 신분의 높고 낮음과 부유하고 가난한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장자는 도를 통해서 초월할 것을 이야기 한다. 도는 원래 무한정한 것이고 사물의 구별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무한정한 자연을 한정 지으려 하고 이를 통해 자연을 정복 하려 한다. 사물을 대비하고 분별하여 질서를 세우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판단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들이 자신의 지식을 앞세워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고, 싸우고 대립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지知를 버리지 않는 한, 이러한 비극은 멈출 수 없다.

 

장자(내편) : 6편 대종사(大宗師)

참된 사람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모른다. 세상에 나옴을 기뻐하지도 않고 저승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려 하지도 않는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올 따름이다. 그는 삶의 시작을 꺼리지도 않고, 삶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는다. 삶을 받아도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어도 기뻐한다. 이것이 자기 마음으로써 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사람으로써 하늘을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를 두고 참된 사람이라 부른다.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損道, 不以人助天. 是之謂眞人.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없다. 자기 자신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고, 지에 의해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써 자연을 해치지 않는 생활 방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장자는 자연의 도를 따르는, 자연 그대로의 궁극적인 이상의 인간으로 ‘진인’을 이야기 한다. 인간이 도와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하며, 그러면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에 이른다. 이렇듯 장자가 말하는 자유는 자신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도를 체득함으로써 현상계의 차별과 대립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 즉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자시의 주어진 현실 속에서 살면서도 그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한 정신을 가진 것이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다.        

 

 2-1. 장자가 본 인간, 인간의 도道

- 장자(외편) : 9 편 마제(馬蹄)

“백성들에게는 자연으로 부여받은 참된 본성이 있다. 길쌈을 해서 옷을 지어 입고, 농사를 지어 밥을 먹는데 이것이 다 같이 타고난 성질(자연적 본성과의 일치)이라고 한다. (또 다른 특징으로) 모든 사람이 한결 같아서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인데, 이를 자연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유(天放)라고 한다.

따라서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상(至德之世)의 사람들은 행동이 신중하고 그들의 눈길은 한결같다. 이때에는 산에 오솔길도 없었고, 물 위에 배도 다리도 없었다. 만물이 무리를 이루어 살았고, 그들이 사는 고장 이웃하고만 접촉을 했다. 새와 짐승이 무리를 이루었었고, 풀과 나무는 마음껏 자랐었다. 새와 짐승들을 끈으로 매어 끌고 다니며 놀 수가 없었고, 새의 둥지를 기어올라가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지극한 덕(자연적 본성)으로 다스려지던 세상에서는 새나 짐승이 함께 어울려 살았었고, 만물과 뒤섞여 구분이 없었으니. 어떻게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알았겠는가? 다 같이 무지하여 그의 타고난 성질을 떠나지 않았었다. 다 같이 욕망이 없었는데 이것을 소박함이라 말한다. 소박함으로써 백성들의 본성은 보전되는 것이다.

彼民有常性, 織而衣, 耕而食, 是謂同德. 一而不黨, 命曰天放. 故至德之世, 其行塡塡, 其視顚顚. 當是時也, 山无蹊隧, 澤无舟梁. 萬物群生, 連屬其鄕. 禽獸成群, 草木遂長.是故禽獸可係羈而遊, 鳥鵲之巢可攀援而闚. 夫至德之世, 同與禽獸居, 族與萬物竝, 惡乎知君子小人哉! 同乎无知, 其德不離. 同乎无欲, 是謂素樸. 素樸而民性得矣

 

<장자> 외편에 속하는 9편에서 장자는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따라서 어떠한 차별도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원시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자연으로부터 타고난 능력을 완전히 발휘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구별과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보존된다.

 

 

- 장자(잡편) : 23편 경상초(庚桑楚)

“삶을 보양하는 방법이란 위대한 도 하나를 지니는 것이며, 자기 본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점치는 것에 의해 자기의 길흉을 판단하려 들지 않아야 하고,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인위적인 행위를 그만둘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기를 충실히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행동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마음은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아이처럼 순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과 지극히 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의 덕과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보면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데 밖의 물건에 대해 치우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합니다. 밖의 물건에 순응하고 자연의 물결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이 삶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衛生之經, 能抱一乎, 能勿失乎, 能无卜筮而知吉凶乎, 能止乎, 能已乎, 能舍諸人而求諸己乎, 能翛然乎, 能侗然乎, 能兒子乎. 兒子, 終日. 和之至也. 終日握而手不掜, 共其德也. 終日視而目不. 偏不在外也. 行不知所之, 居不知所爲, 與物委蛇, 而同其波. 是衛生之經已

 

노자의 제자인 경상초가 자신의 제자인 남양주를 노자에게 보내어 진행되는 대화로 이루어진 <장자> 잡편雜篇 제23편 경상초庚桑楚에서 삶의 보양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남양주에게 노자가 이렇게 답한다.

여기서 <장자>가 노자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무지 무욕의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 혹은 타고난 본래의 상태 속에서만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발견되며, 인위적인 행위들 (문명, 제도, 인의예악 등)에서 벗어 날 것을 이야기 한다.

 

 

- 장자(외편) : 16편 선성(繕性)

옛날 사람들은 혼돈하여 어두운 가운데 온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담백하고도 적막한 생활을 했다. 그 때는 음양이 조화되어 고요했고, 귀신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사계절은 절도에 맞았고, 만물은 훼손됨이 없었으며, 모든 생물은 일찍 죽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비록 지혜를 가졌다 해도 쓸 곳이 없었다. 이것을 지극한 통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때에는 일부러 하는 일이란 없이 언제나 자연스러웠다.

덕이 쇠퇴하자 수인과 복희가 천하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연을 따르기는 했지만 통하여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덕이 더 쇠퇴하자 신농과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래서 안락하기는 하였지만 자연을 따르지는 않게 되었다. 덕이 더 쇠퇴하자 요와 순이 세상을 다스렸다. 정치와 교화의 나쁜 풍속을 일으켰고, 순진함이 없어지고 소박함이 사라졌으며, 선을 위해 도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했고, 덕을 저버리고 행동하게 했다. 그렇게 된 뒤에는 사람의 본성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따르게 되었다. 마음과 마음으로 상대방을 살펴 알았으나 천하를 안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뒤에 문채를 거기에 더해졌고, 넓은 지식을 더했다. 문채란 본질을 멸실케 하고, 넓은 지식은 마음을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뒤에는 백성들이 미혹되어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 그들의 본성과 진실로 되돌아가거나 그들의 원래상태로 복귀할 수가 없게 되었다.

古之人, 在混芒之中, 與一世而得澹漠焉. 當是時也, 陰陽和靜, 鬼神不擾, 四時得節萬物不傷, 群生不夭, 人雖有知, 无所用之, 此之謂至一. 當是時也, 莫之爲而常自然.

逮德下衰, 及燧人伏羲始爲天下, 是故順而不一. 德又下衰, 及神農黃帝始爲天下, 是故安而不順. 德又下衰, 及唐虞始爲天下, 與治化之流, P淳散朴, 離道以爲, 險德以行, 然後去性而從於心. 心與心識知, 而不足以定天下, 然後附之以文, 益之以博. 文滅質, 博溺心, 然後民始惑亂, 无以反其性情而復其初.

 

 

<장자>는 문명사회의 특징을 혼란과 파괴로 규정하고, 인간이 자연과 질서로부터 멀어질수록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쇠퇴한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인간은 무의식적, 무차별적 삶을 사는 인간이다. 이러한 차별이 없는 사회로 장자는 원시 공동체를 제시한다. 장자와 같은 시대의 다른 사상들인 유가, 법가, 묵가 등의 이념을 장자가 비판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렇듯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그들의 사상이 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시의 억압과 수탈은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통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장자의 바람대로 인간이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적 측면에서는 내적 수양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와 정신의 자유를 얻어야 하며, 사회적 측면에서는 모든 억압과 수탈의 도구를 파기하고 위정자의 최소한의 정치 행위를 통해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장자는 개인적 측면에서의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위해 ‘심재와 좌망’을 방법으로 제시한다. 심재와 좌망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비 자연적, 차별적, 인위적 요소를 제거 하고 무의식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신체의 각 기관은 본래부터 타고난 자연적 기능이 충분히 발휘된다.

 

 

 

 2-2. 장자가 본 사회, 사회의 도道

앞 장에서 인간의 도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이번 장에서는 인간이 속한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장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인위적인 제약이 없이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곳이다.

- 장자(외편) : 10편 거협(胠篋)

세상의 지혜 중에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꾸려놓는 것이 아닌 것이 있는가? 이른바 성인이란 큰 도적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닌 이가 있는가?

옛날 제나라는 이웃 고을이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소리가 서로 들리도록 인가가 많았고, 고기그물, 새그물이 쳐지는 곳과 쟁기와 괭이로 일궈지는 땅이 사방 이천여 리나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방 국경 안에 종묘와 땅의 신, 곡식의 신의 사당을 세우고 마을을 다스리는 방법이 어느 하나 성인을 본뜨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전성자는 하루아침에 제 나라 왕을 죽이고 나라를 도둑질했다. 도둑질한 것이 어찌 나라뿐이겠는가? 성인의 지혜에서 나온 법까지도 도둑질했다. 그래서 전성자는 도둑이라는 명성은 붙여졌어도 몸은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편안히 지냈다. 조그만 나라는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하였고, 큰 나라도 감히 그를 처벌하지 못했으며, 12대에 걸쳐 제나라를 차지했었다.

그처럼 제나라와 함께 성인의 지혜에서 나온 법까지도 훔침으로써 그 도적의 몸이 지켜지지 않았던가?

故嘗試論之, 世俗之所謂知者, 有不爲大盜積者乎. 所謂聖者, 有不爲大盜守者乎. 何以知其然邪. 昔者齊國隣邑相望, 鷄狗之音相聞, 罔罟之所布, 耒耨之所刺, 方二千餘里. 闔四竟之內, 所以立宗廟社稷, 治邑屋州閭鄕曲者, 曷嘗不法聖人哉. 然而田成子一旦殺齊君而盜其國, 所盜者豈獨其國邪. 竝與其聖知之法而盜之. 故田成子有乎盜賊之名, 而身處堯舜之安, 小國不敢非, 大國不敢誅, 專有齊國. 則是不乃竊齊國, 竝與其聖知之法以守其盜賊之身乎.

...

성인이 죽어버리면 큰 도적은 생기지 않고, 세상은 평화로워져 아무 탈도 없게 될 것이다. 성인이 죽어버리지 않으면 큰 도적은 멈추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며 세상을 다스린다 해도 그것은 바로 도적을 존중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다.

聖人不死, 大盜不止. 雖重聖人而治天下, 則是重利盜跖也.

 

 

큰 도둑이란 나라를 훔친 자 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연스럽게 살 권리를 훔친 도둑이다. 장자는 성인이라는 자들과 그들의 지혜가 지배 계층의 수탈을 정당화 시켜주고, 그것을 도와주는 도구라고 이야기 한다. 또한 거협 다음 편인 재유在宥에서는 “어짊을 좋아한 결과 타고난 덕을 어지럽히게 되었고, 의로움을 좋아한 결과 의리에 어긋나게 되었고, 예의를 좋아한 결과 겉치레로 흘러 자기를 잃게 되었고, 음악을 좋아한 결과 음탕함에 빠져 자신을 잃게 되었고, 성인을 좋아한 결과 재주에 얽매여 자신을 잃게 되었고, 지혜를 좋아한 결과 남의 허물 찾느라 자신을 잃게 되었다.” 고 말하며 인류의 인의예악과 지혜 모두를 비판한다. 이는 “성인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노자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권위, 폭력, 수탈, 빈곤 기아, 전쟁, 죽음 등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장자의 목표였다. 그리고 이러한 장자의 이상은 내편의 개인의 정신적 자유의 세계를 의미하는 ‘무하유지향’에서, 외편의 모든 인류의 자유와 평등의 세계를 말하는 ‘지덕시세’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지덕시세’를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 장자(잡편) : 29편 도척(盜跖)

옛날에는 새나 짐승이 많고 사람의 수는 적어, 사람들은 모두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며 짐승의 해를 피했고, 낮에는 도토리와 밤을 줍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유소씨의 백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또 옛적에는 백성들이 옷을 입을 줄도 모르고 여름이면 장작을 쌓아놓았다 겨울에는 이것을 땠다. 그래서 이들은 지생의 백성이라고 한다. 신농씨 시대에는 안락하게 누워 자고 일어나서는 유유자적했다. 백성들은 자기의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몰랐고, 고라니나 사슴들과 함께 살았다. 농사를 지어서 먹고 길쌈을 해서 옷을 입었으며 서로를 해치려는 마음 따위는 지니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극한 덕이 한창 성했던 시대였다.

古者禽獸多而人少, 於是民皆巢居以避之, 晝拾橡栗, 暮栖木上, 故命之曰 有巢氏之民. 古者民不知衣服, 夏多積薪, 冬則煬之, 故命之曰知生之民. 神農之世, 臥則居居, 起則于于, 民知其母, 不知其父, 與麋鹿共處, 耕而食, 織而衣, 無有相害之心, 此至德之隆也.

 

이렇듯 ‘지덕시세’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구별이 나타나기 전의 원시 공동체이며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사회적, 문화적 제약을 받지 않고 타고난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도 타고난 그대로의 생명을 손상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며,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삶을 산다.

장자는 외편 제 20편 산목山木에서는 현실적 존재하는 이러한 나라를 제시하기도 한다.

“남월에 한 고을이 있는데 이름을 건덕이라 부릅니다. 그 곳의 백성들은 어리석고 순박하며, 사사로움이 적고 욕망도 적으며, 일 할 줄만 알았지 물건을 저장해 둘 줄은 모릅니다. 남에게 무엇을 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어떤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알지 못하며 예의란 어떻게 하여야 지켜지는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멋대로 무심히 행동하면서도 위대한 자연의 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즐겁기만 하며 죽으면 편히 묻힙니다. 임금께서도 나라를 떠나 속된 일을 버리시고 자연의 도와 어울리며 그곳에 가십시오.

남월은 중원 지방에서 매우 멀리 덜어진 낙후된 지역으로, 당시 유가에서는 이들을 초나라 사람들과 함께 매우 천시 하였다. 하지만 장자는 유가의 본고장인 노나라 임금에게 유가를 버리고 남월에 가서 도가의 도를 실천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자가 그리는 이상 사회는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차별이 없어야 하며, 더불어 원시적 농업, 수렵을 통해 살아간다. 장자는 노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 하였는데 <장자> 잡편 양왕讓王에서는 순임금이 선권에게 천하를 넘겨주려 하자 선권이 거절하면서 “봄에는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육체가 노동하기에 충분하고, 가을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겨울이면 몸을 충분히 쉬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천지 사이에 자유롭게 살며 마음은 흡족 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렇듯 장자는 무의식 속에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노동,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 하였고, 노동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먹을 자격이 없다고 비난 하였다.

 

- 장자 (외편) : 12편 천지(天地)

“지덕지세에서는 현자를 숭상하지도 않고 유능한 자를 등용 하지도 않았다. 군주는 마치 깃대처럼 서 있기만 했고 백성들은 들사슴과 같았다.

至德之世, 不尙賢, 不使能. 上如標枝, 民如野鹿

 

장자는 당시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어리석은 군주와 간사한 신하로 대변되는 위정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장자는 인의나 법률등 외적 강제 없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상성常性, 즉 타고난 그대로의 본성을 유지하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가 상연常然의 사회 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에 부득이 하게 군주가 군림을 해야 할 때에는‘무위無爲’의 정치를 할 것을 이야기 한다. 즉 지배자로서 군림 할 것이 아니라 오직 평온하고 무욕한 마음으로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만 서 있으라는 것이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백성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무위’를 실천하는 정치인 것이다.

 

3. 노자 철학과 장자 철학은 같은가?

 

우리는 흔히 노자와 장자를 묶어서 ‘노장’ 이라고 말한다. 장자가 노자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부분도 있지만, 장자가 노자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며 장자만의 독창적인 상상도 많이 있기 때문에 노자와 장자를 ‘노장’이란 말로 일반화 하여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3-1. 노자와 장자의 공통점

첫째로 노자와 장자는 당시의 전통과 사상, 제도를 비판하였다. 노자와 장자는 모두 유가, 법가, 묵가, 명가 등의 당시 사상을 부정하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의  인의예악을 공통적으로 비판하였다.

둘째로 노자와 장자는 도道와 덕德을 근본 개념으로 삼았다. 하지만 장자의 도가 노자의 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를 두고 노자의 도를 장자가 발전 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3-2. 노자와 장자의 다른점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를 “그의 학문은 대단히 박학하여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요지는 노자의 사상에 귀착하고 있다.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去篋 따위의 판명을 지음으로써 공자의 제자를 꾸짓고 노자 사상을 드러내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물론 이러한 곳에서 드러나는 장자의 정치 비판은 노자와 닮아있다. 하지만 <장자> 사상의 핵심은 외편과 잡편이 아닌, 내편의 <소요유> <제물론>이며 이는 노자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장자가 내편에서 강조하는 만물제동, 제물아, 양신장생과 같은 이론은 노자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힘들다.

 

노자와 장자의 처세의 차이와 철학의 차이

첫째, 장자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사회의 모순을 직시 하면서도 그 모순에 연루 되지 않고자 하였다. 즉 세속에 살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자 하였다. 장자는 노자와 달리 역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판단을 중지함으로서 인사人事와 생사를 초월하고 시종始終을 무시한다는 특색을 보인다. 장자는 이러한 사상에 기초하여 만물제동과 소요유 등과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둘째, 정치에서도 노자는 군주의 통치술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만 장자는 ‘천하는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고 말하며 노자의 백성, 천하, 임금, 만승지주萬乘之主 등을 부정해 버린다. 백성과 임금, 신하와 임금과 같은 인간 사이의 차별을 부정 하였으며, 만약 할 수 없이 군주가 있어야 한다면 최소한의 ‘무위’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노자가 이야기 하는 이상 인격으로의 성인은, 장자에게 와서는 지인, 진인, 신인 이라는 개념으로 바뀐다.

넷째, 노자는 무위이무불위 無爲而無不爲를 주장하여 성공에 이르는 사회적 표준을 제시하는 등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만, 장자는 오히려 세속 밖으로 초월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4. 장자 사상의 핵심 <소요유> <제물론>

 

장자 사상의 핵심이면서 장자와 노자의 차이점이 되는 내편의 1편 소요유와, 2편 제물론을 통해 장자의 사상과 철학을 알아보자.

 

- 장자(내편) : 1편 소요유(逍遙遊)

지혜는 벼슬 하나를 감당할 만하고, 행동은 한 고을에서 뛰어나고, 덕은 한 임금을 받들기에 적당하고, 능력은 한 나라의 신임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도 이 메추리와 같다. 송영자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웃었다. 그는 온 세상이 칭찬을 한다 해도 즐거워하는 일이 없었고, 온 세상이 비난을 한다 해도 기죽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밖의 일의 분수를 잘 알고 영예와 치욕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세상일에 대해 급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부분은 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녔다. 한 번 나서면 15일이 되어야 돌아왔다. 그는 바람에 연연하여 마음 졸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걸어 다니는 것은 비록 면했다 해도 아직도 의지하는 데가 있다.

만약 하늘과 땅의 참 모습을 타고 날씨의 변화를 따라 무궁함에 노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디에 의지하는 데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이룬 공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而徵一國者, 其自視也亦若此矣. 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境, 斯已矣. 彼其於世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冷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无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无己, 神人无功, 聖人无名.

 

작은 세계에 사는 것은 큰 세계에 사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짧은 시간을 사는 것들은 오랜 세월을 알 수 없다. 지식을 길러 관리가 된 사람, 공을 세워 한 고을의 원이 된 사람, 재능을 인정받아 대신이 된 사람, 덕이 높아 임금이 된 사람, 그들은 각자 모두 자신이 스스로 높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남명을 향해 날아가는 대붕의 생각을 모르는 한낮 메추라기에 불과하다. 열자 역시 마찬가지로 세상을 벗어나 속박되지 않지만, 결국은 바람에 의지해야 함으로 참다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는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지인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신인은 공적을 생각하지 않고, 성인은 명성에 관심이 없다.     

 

 

- 장자(내편) : 2편 제물론(齊物論)

물건은 저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이것이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저것은 저것의 입장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것으로서 알게 되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 말미암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말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도 있다. 가능한 것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 있다. 옳음이 있어 그릇됨이 있고, 그릇됨이 있어 옳음이 있다.

그래서 성인은 이런 것에 의하지 않고 그런 것을 자연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옳음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은 또 이것이 된다. 저것도 한가지 시비가 되고, 이것도 한가지 시비가 된다.

그러면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추라 한다. 도추가 되어야 둥근 고리의 중심을 차지한 꼴이 되어 무궁한 변화에 따를 수 있게 된다.

옳음도 역시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이고, 그름도 역시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밝은 지혜로써 판단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하는 것이다.

物无非彼, 物无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제물론’ 편은 모든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차별이 없으며 모두 평등하다고 이야기 한다. 따라서 만물이 모두 평등하며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만물은 일체라는 것이다. 장자의 이러한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은 “천지는 나와 함께 태어났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낳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물일체 사상을 통해 장자는 대大, 미美, 귀貴 를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기존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부정한다. 만물일체의 평등 앞에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 신원문화사 | 1996 

장자와 문명 | 김갑수 지음| 논형 출판사 | 2004

노자와 장자 -무위와 소요의 철학 | 이강수 지음 | 길 출판사 | 2005

노자와 장자의 철학사상 |김성원 지음| 명문당 | 2002

유학자들이 보는 노장철학 |조민환 지음| 예문서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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