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및 철학

묵가의 겸애주의

사이코 킬러 2009. 8. 7. 09:59

묵가의 겸애주의


  도가가 철저히 개인의 권익을 옹호했던 것과는 반대로 묵가는 철저히 공익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묵가는 도가의 위아주의는 물론, 유가의 친친주의도

배격하고 겸애주의를 표방한다. 묵적에 따르면, 천하의 모든 혼란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들은 자기만 아끼므로 아버지를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고, 아우는 자기만 아끼므로 형을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하며, 신하

자기만 아끼므로 임금을 해쳐서 자기를 이롭게 한다. 묵적은 이러한 이기주의가

혼란의 근원이라고 본다. 또한 묵적은 유가에 대해서 별애주의라며 비판하였다. 별애

자기와 남을 구별하여 자기와 친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겸애주의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묵적은 공익이라는

맥락에서 침략전쟁과 음악,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불필요하게 재물을 낭비할 뿐 공익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묵적의 주장대로 완전한 겸애가 실현된다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불평등과

억압이나 착취가 없을 것이여,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 낙원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동기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위적으로도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기심은 개인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북돋는 계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겸애에 의한 공익의 실현은 인간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겸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태한 인간들에게는 실존적 긴장을 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익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공익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비능률과 정체로

이어지기 쉽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묵적의 겸애주의는 그 이상은 좋으나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묵적은 자신의 주장이 실행할 수 없는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즉 어떤 사람이

전도를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을 떠나야 할 때, 자기의 처자를 겸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인가 아니면 별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인가? 묵적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별애주의자조차도 자가의 처자를 겸애주의자에게 맡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적이 든 예와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러저러한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오직 한 생명밖에는 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자기의 자식을 희생시키고

남의 자식을 구할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또한 설령 겸애주의가 타당하다

하더라도, 한국인인 내가 아프리카 어느 구석의 굶주린 아이들과 내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곳의 굶주린 아이의 숫자를

헤아려서 내 자식의 숫자와 더하고, 그 다음 나의 수입을 그 숫자로 나누어 1인당

몫을 계산한 다음 아프리카 어린이의 숫자에 해당되는 만큼을 구호기금으로 보내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메리카의 부유한 아이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애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묵가의 겸애주의도 역시 현실성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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