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및 철학

도가의 사상

사이코 킬러 2009. 8. 7. 09:57

이제는 누구나 도(道)를 말한다.

"그 사람은 뭐에 도사야" "도통했네" 등으로 일상 생활에서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다.

가 그만큼 친숙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평가 절하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노자는 무엇을 도(道)라 이름했을까?

노자가 말한 는 무엇일까?

노자와 장자의 사상의 핵심은 를 아는 것이다,

노장은 를 말하기 위해 우화로 들려주었다.

그래도 우리는 모른다.

는 무엇인가? 이는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이고 이곳을 찾는 이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도덕경 첫 머리에 이렇게 나온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라고 말했을 이미 그것은 가 아니다. 이는 는 말할 수 없는 존재이고 말할 표현하는 는 참된 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학생들은 웃으며 "에이-"하고 야유를 보낸다.

도(道)는 보여주거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보통명사가 아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준다. 옛날 북극부근에 사는 에스키모들은 벌꿀을 본적도 없고 먹어 본적도 없을 것이다. 어떤 에스키모가 꿀을 맛보고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꿀맛을 설명한다. 어떻게 설명할까?

  학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달콤하다. 쌉쌀하면서도 달다. 설탕 맛이다." 온갖 표현을 다 빌리지만 꿀맛에 접근한 표현은 없다. 곧 학생들은 꿀맛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 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게된다.

 

  도는 체험하는 것이지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 학생들은 를 설명 들으려하고 이해하는 방법으로 접근한다.

  장자도 역시 그렇게 말했다. 지식(知)과 말(言)로는 대도를 헤아릴 방법이 없다고.

 

  그러나 를 설명(?) 한다. 추상적으로, 교과서적으로 설명한다.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를 설명한다. 학생들이 들으며 "아하, 가 그런 것이구나"하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까?

  우주 자연의 운행 질서, 자연의 생성의 원리, 대 자연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말해본다. 모든 것을 초월해 최고의 높은 경지에 이르면 인간과 자연의 운행 질서 원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공부도 가 있다. 영어나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 쉬워지고 다 알게 된다. 그 수준의 를 깨달은 것이 아닐까? 점점 상위 개념으로 올라가면 어느 순간 우주와 자연의 질서 운행 원리, 인간의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래도 나나 학생이나 뜬구름 잡는 식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노자가 말씀한 와 학자들이 다시 설명한 를 다시 제시한다.

 

 

도(道)란?

 

      큰 덕의 모습은 도와 같다. 도는 오직 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상을 분간해 인식할 수 없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사물이 있다.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속에 형상이 있다. 도는 아득히 멀고 그윽이 어둡기만 한데, 그 속에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지지극히 진실하다. 그 속에 믿음이 있다.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천지보다는 먼저 생겼다. 고요히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짝도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디나 안 가는 곳이 없건 만은 깨어지거나 손상될 위험이 없다. 그것은 천하 만물의 어머니가 될 말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부르는 이름이 '도(道)' 이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큰 것(大)' 이라 한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고 한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이 '희(希)'라고 한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 )'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말로 밝힐 수 없다. 그래서 뒤섞어서 '하나(一)'라고 한다. 그 것은 위가 더 밝지도 않고, 아래가 더 어둡지도 않다. 긴 끈처럼 꼬여서 이어져 있으니 이름 붙일 수가 없다.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을 꼴 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한다.

     

     도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겉에 가지고 양기를 안에 간직하며 충기( 氣)로 조화를 이룬다.

     

     전화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

     

     도는 비어 있는 듯하나 그 작용은 가득 찬 듯 도는 아닌 듯하다. 깊고 아득하여 만물의 근원이며, 맑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하느님보다 먼저인 듯하다.

    (-노자-)

 

 -아래 많은 부분을 <동양철학 에세이(동녘)-김교빈.이현구>에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황활'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표현들은 보면 노자는 남들이 말하지 않았던 무엇을 본 듯하고, 그 것이 '도(道)'라는 이름을 붙이면서도 이름 붙이기를 몹시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우리가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글 속에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에 대한 관념을 바꿔 놓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無)','자연(自然)' 이라는 말로 도의 성질을 나타내 도가 무한하고 객관적인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중국 고대에는 자연계의 운행도 인간 세상의 사건도 모두 상제의 의지에 다라 결정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왕은 상제의 뜻을 받아 지상을 지배하는 하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왕은 천자라고 하였습니다.

 천자는 상제에게 제사를 올리고, 상제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시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제사를 게을리 하거나 상제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면 상제는 가뭄과 홍수, 그 밖의 천재 지변으로 왕에게 벌을 내립니다. 개인의 경우일지라도 사람답지 못한 행위를 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합니다. 도란 인간의 영사에 관여한다고 믿어 온 상제를 부정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면서 만물의 근원입니다. 감각에 들어오는 만물은 총괄하여 '있는 것'에서 나옵니다.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잡히고 인간이 이름 붙일 수 있는 한정된 것입니다. 도는 인간이 한정할 수 없는 존재,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무한한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성격을 '무' 라고 하였습니다. 도는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무엇에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 한다고 하고, 그러한 성질을 자연이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노자-

 

 노자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자연 과학 혹은 자연 보호라고 할 때의 자연과 전혀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대상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의 상태와 성질을 나타낸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저절로 그러하다.','본래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도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존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노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범위를 넷으로 크게 나눈 다음 그 사이에 단계를 두었습니다. 인간과 땅과 하늘은 결국 도를 본받지만 도는 더 이상 본받을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은 언어, 지혜, 기교를 씀으로써 도의 자연에 거슬리고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이 도 개념을 근거로 유가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인생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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