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및 철학

도에 관하여....

사이코 킬러 2009. 10. 6. 19:19

<孔子 曰>

 

<목차>

 

<道란?>

  <道>란 만물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되 형상도, 소리도, 실체도 없으며 도한 영원불변한 것이요. 언어나 문자로 명백히 해석될 수 있는게 아니오. 大道를 이해하려거든 언어, 문자 이름 따위에 집착말고 네 마음 전부로써 깨달아라. 그렇지 않으면 혼미함에 빠지고 말지니.

  천지가 시작될 때는 물체도 형상도 없었다. 이 상태를 가리켜 <무>라 하느니라. <무>란 즉 <도>의 본체로서 우주의 본원이니라. <도>가 창생의 작용을 하면 만물은 잇달아 생겨나거늘 이를 <유>라 하지. <유>는 즉 <도>의 작용이지. 고로 천지의 본시가 <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도의 본체가 순수, 오묘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만물의 근원이 <유>라는 것을 깨달으면 도의 작용이 광대, 무변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무>와 <유>란, 하나는 도의 본체요, 또 하나는 도의 작용이니, 결국 한몸에서 나와 이름만 달리한 것 뿐이라! 이 모두가 심원하고 미묘한 것이니 현묘하고 현묘할 뿐이라! 이것이 즉 우주만물이 창생된 본원인 <도>인 것이다.

  우주의 본체는 <무>이다. <무>로부터 천지가 생겨났고, 천지로부터 만물이 생겨났으니 결국 만상이 어우러진 세계가 형성된 것이다.

<美와 醜> 세상 일체의 개념과 가치란 다 사람이 세운 것이며, 가치판단이란 다 비교하므로 생긴 것이다. 또한 상대적 관계란 수시로 변하는 것으로서 가치판단 역시 부단히 변하는 것이다. 미와 추, 유와 무, 난과 이, 장과 단, 고와 하, 전과 후 등 모든 걸 태연히 대처하되, 범인적인 우려를 버려야 한다.

<地位와 名譽> 지위와 명예는 경쟁심을 일으키고, 재물은 욕심을 불러 준다. 그로부터 나온 거짓이란 한도 끝도 없이 나타나, 결국 사회에 혼란과 충돌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

<道의 本體> <도>는 공허한 것이나 그 작용은 무궁한 것이다.이러한 심오함이 만물을 능히 낳으니 만물의 본원이로다. 그것은 형체도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실존해 있는 것이로다. 나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하느님보다도 먼저 있었던 것 같다. <도>는 빈 상태이면서도 아무 것도 갖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그 공허함 속에는 무진한 차조인자를 감추고 있어 그의 작용은 끊임이 없기 때문이다.

<天地는 偏愛를 모른다> 천지는 극히 공평하여 만물을 차별없이 대하기에 짚으로 엮은 개 취급을 하는가 하면 사랑함도 미워함도 없다. 성인 역시 지극히 공평하여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버려두어 사랑도 미움도 아니 주며 전부를 똑같이 대한다. 대도는 만물을 낳아 자연에 맡기고 편애하지 않는다. 정치가도 이러한 정신을 본받아 무위무언하면 백성들은 편안케 되고 사회도 안정되리.

<天地는 長久하다>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일체의 움직임을 스스로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은 모든 것에 겸허하여 양보하나 도리어 추대를 받고, 이해득실에 다투지 않아도 이익을 받으니, 이야말로 이기심이 없기에 자아를 성취한 결과로다. 겸양은 도리어 추대를 받게 하고, 매사에 남을 위함은 도리어 자신의 이상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

<善은 물과 같다> 도덕을 지닌 자는 마치 물 같아라. 물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만물을 능히 키워 냄이요. 둘째, 본성이 부드럽기에 자연을 쫓으며 다투지 아니 함이요. 셋째,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모여 흐름이다. 물은 낮은 곳에 처하니 도덕있는 자의 겸허함과 같다. 못은 깊고 맑으니, 도덕있는 자의 정함이요, 침묵이로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니 도덕있는 자의 기댐없는 베품이로다. 물은 만물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니 도덕있는 자의 지성스러운 말이요, 결코 허위 없음이로다. 물의 성질은 부드러워 모나게도 둥글게도 되거늘, 사람이 물의 다투지 않는 덕을 배워서 만물에 유리하고 겸허한 결과를 낳으면 비로소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적당히 채워라> 어떤 그릇에 물을 채울 때 지나치게 채우고자 하면 곧 넘치고 만다. 칼은 쓸 수 있으면 되는 것이요. 만일 너무 예리하게 갈고자 하면, 날이 지나치게 서 쉬이 부러지고 만다. 금은보화를 지나치게 지닌 자는 남의 시기를 사게 되며 또한 생활이 어지러워져 결국은 이 보화들을 지닐 수 없게 되리니. 구러므로 사람은 성공한 후, 적당한 기회를 봐 물러남이 자연의 도에 맞느니, 마치 하늘과 같은 것이다. 하늘은 만물을 낳되 소유하지 않으며 의지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관여하지 않느니...

<道를 안고서> 마음 속에 도를 꼭 간수하고 정신과 몸을 하나로 하여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리적 본능대로 맡겨두어 마음 부드럽기가 갓난 아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 마음의 작용을 배제하여 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다스림에 무위자연을 따를 수 있는가?

   몸의 감각기관이 외게와 접촉해도 조용히 삼갈 수 있겠는가? 모든 것에 통달하였으면서도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활은 반드시 형체와 정신이 하나되어 나누어지지 않아야 한다. <도>를 지킬 수 있음이 육체적 생활과 정신적 생활에 조화를 이루느니라.

<無와 有의 쓰임> 세인들은 '유'의 이익만 알뿐 '무'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 사실상 '무'의 쓰임이란 '유'보다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꽂혀 있음은 바퀴통이 비었기에 수레로서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이며, 찻잔을 보라. 가운데가 비었기에 그릇으로서의 쓸모를 발휘할 수 있는 것.

  창문의 경우도 마찬가지, 우린 그것의 '무'를 이용하고 있으며, 한 칸의 방 역시 그의 '무'가 있으므로 인해 거주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 요컨대 '유'가 사람에게 주는 편리함은 '무'가 그 자체의 작용을 발휘하고 있음으로써이다. 단지 '유'의 존재만으로는 큰 쓰임을 발휘할 수 없으나, '유'와 '무'가 배합됨으로써만이 큰 쓰임을 발휘하는 법.

  모든 그릇의 스임이란 완전히 '무'에 있다. '대도'란 무형무상하나 또한 천지만물은 이 '도'로부터 고루 나왔으니, 무형무상한 '도'야 말로 그 쓰임이 묘하고도 무궁하도다.

<五色, 五音, 五味>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에는 한도가 있는데 욕망은 무궁하다. 색채를 즐기는 것도 지나치게 추구하노라면 결국 시각적 이상이 오고 만다. 소리를 즐기는 것도 지나치게 추구하노라면 결국 청각이 마비되고 만다. 맛을 즐기는 것도 지나치게 추구하노라면 결국 미각을 잃게 되어 모르게 된다.

  놀이에 지나치게 마음을 주노라면 결국 마음이 어수선해져 지킬 수 없게 된다. 금은보화를 너무 추구하노라면 결국 덕행을 해쳐 자신을 망치고 만다.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성인의 생활은 검소하여 그저 배를 불릴 뿐 관능적 향수는 쫓지 않는다. 즉 질박하나 사치를 쫓지 않는다.

  욕망이란 가늠할 수 없는 것이라 더 이상 오르지 못하면 깨지고 만다. 욕망을 너무 쫓아 정제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만족과 편함을 느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자아상실을 맛보게 된다.

<명예와 굴욕>  세인은 명예의 득실을 너무 중히 여기는 고로 명예를 얻거나 굴욕을 받으며 떨며 두려워 한다. 큰 환난에 잔뜩 겁을 먹고 움찔 움찔 몸이 놀라는 것은 어쩐 일인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며예란 고상한 것이며 이를 얻음은 고귀하다 여기기에 그걸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굴욕은 천하여 이를 당하면 창피하다 여기기에 그걸 당할까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에게 큰 환난이 있는 것은 우리가 왕왕 '자기'라는데 집착하기 때문이니... 만일 우리가 자기를 잊을 수 있다면 무슨 환난이 있으리요? 고로 누군가가 자기를 희생하여 천하를 돌보고자 한다면 온 천하를 그에게 다 맡겨도 되리로다. 사욕을 없애고 나를 잊으라. 생사를 도외시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이 흐트러지지도 않겠지. 그리하면 일체의 명예, 굴욕, 화복 등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움 조차 있을쏘냐?

<허와 정>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공허하고 고요하나, 때때로 사욕으로 눈이 가리워져 그로 인해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행동도 정상을 잃는다. 고로 우리는 힘을 다해 마음을 공허하게 맑고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만물의 생장과 순환의 도리를 똑똑히 볼 수 있다.

  만물이 어우러져 각기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靜)' 혹은 '상(常)'이라 한다. '상'을 이해함을 '명(明)'이라 하며, 상을 깨닫지 못하고 경거망동하게 되면 화를 일으키게 된다. 상도(常道)를 깨달은 자는 갖지 아니한 것이 없어 너그러우니 편애를 않게 되며 자연에 부합되어 즉 '도'에 부합될 수 있다.

  '大道'에 부합되어야만 영원히 썩지 않을 수 있으니 이러므로써 종신토록 여하한 위험도 없을 것이로다. '공허'와 '고요'에 이르고 나면 사리를 밝혀 깨달을 것이요, 만물의 변화하는 법칙을 통찰하리니 이는 즉 자연의 묘미를 심득하여 '도'와 한몸을 이루는 것이다.

<道를 잃으면?>  상고시대의 백성은 성실하여 아무런 지식도 갖지 않았으나 허위라곤 없었다. 중고시대에는 민정이 날로 혼란해지니 지배자는 그의 지혜로 제도를 만들어내 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허위수작은 꼬리를 물게 된 것이다.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지낸다면 효도 따윈 아예 필요도 없으나 혈육간에 화목을 잃었기에 효도도 나온 것이라.

  나라가 안태할 때 시나들은 각기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때문에 충신이 따로 없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신하들은 임무를 다하지 않으니 충신이 생기는 것이다. 인의, 지혜, 효도, 자비, 충신 이들은 모두 '도'가 폐하여 순박함이 파멸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도덕이 깨지고 인심이 떨어진 후에 나온 산물이므로 이는 사회적 퇴보이지 진보가 아니다.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학문, 지식은 근심, 번뇌의 근원이다. 일체의 학문, 지식을 버리면 근심도 번뇌도 없으리로다. 세인들은 영예와 선을 취하며 욕됨과 악을 버리나, 실상 그들의 차이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나 나 역시 홀로 두드러지려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구나.

  단, 대도란 그토록 광대하고 다함이 없으니 세속과는 너무 멀리 있도다...세인은 모두 일처리를 잘하는데 유독 나만이 우매하고 둔한 것 같도다! 다만 나는 세인과 달리 '도'의 삶을 중시하노라. 귀천, 선악, 시비, 미추 이들의 가치판단에는 절대성이 없으며상대적으로 형성돼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한다. 세인들은 소리, 색, 물질, 이익을 쫓는 삶에 담백함을 지켜 얽매이지 말되 정신적 향상을 구하도록 하라.

<구부러지면 온전하다>  구부러지면 온전할 수 있으며, 굽히면 펴질 수 있다. 움푹 패이면 채워질 수 있으며, 낡아야만 새로와 질 수 있다.적게 얻으려 하면 도리어 많이 얻을 수 있고, 많이 탐하다 보면 미혹된다. 고로 성인은 '도'를 지켜 천하의 사리를 처리하는 데 모범이 된다. 즉 스스로 나타내지 않아야 뚜렷해지며, 스스로 아는 척 말아야 똑똑해지며, 스스로 칭찬을 말아야 공이 드러나며 스스로 자만을 말아야 장구할 수 있다.

  남들과 다투지 않기에 천하엔 그와 다툴 자도 없다. 고인 말씀에 '구부러져야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이 어찌 헛 말일 수 있으랴? 대개들 사물의 외형만을 구하려 한다. 완전한 것, 꽉 찬 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이로써 무수한 다툼만 유발시킨다. 응당 온유함을 지켜 겸양하여 다툼않는(不爭) 경지에 달할 수 있다.

<최상의 정치가란?>  위정자는 마치 인체의 폐와 같다. 건강한 폐를 갖고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숨을 쉬게 한다는 사실을 의식시켜주지 않는다.만일 매일같이 이 사실을 느끼게 한다면, 그 폐는 반드시 이미 병들어 있을 것이다.

<병기의 道> 무력은 재난과 화를 가져다 준다. 전쟁이란 부득이한 일이므로 마음을 가라앉혀 목적만 달성토록 할 것이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남의 우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똑똑할 뿐이나, 자신의 심성을 아는 자야말로 참 현명한 자로다. 남을 이길 수 있는 자는 다만 힘이 있다고 할 뿐이나, 자기를 극복하는 자야말로 진정 강한 자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만족하는 자야말로 참 부자로다. 도를 체득하고자 쉬지 않고 힘쓰는 자는 진정 뜻있는 자로다.

  도를 잃지 않고 굳게 지켜나가야 장구하도다. 몸은 죽어도 정신은 썩지 않음이 진정 장수하는 것이라. 누구에게나 사욕은 있는 법. 사욕을 생각하기에 앞서 반성하며 자신을 비워라. 스스로 알고, 이기며, 만족하며 힘써 행할 수 있다면 '도'를 얻은 셈이로다.

<도는 다함이 없다>  도를 굳게 지키면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다. 서로 해를 주지도 않아  모두가 태평, 안락하다. 음악과 미식은 길손을 머물게 한다. 도는 담담, 무미하여 볼 수도 들을 수 도 없으나 쓰임에는 다함이 없도다. 인의예법으로 다스림은 마치 음악, 미식과 같아 사람의 귀, 눈, 입, 배는 만족케 해주나 도란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 만족을 얻게 한다.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긴다>  그를 움추리려거든 먼저 펴주도록 하라. 그를 약하게 하려거든 먼저 강하게 해주라. 그를 없애려거든 먼저 치켜주도록 하라. 그를 얻으려거든 먼저 베풀어 주라. 이야말로 밝은 도리이니, 부드러움은 반드시 강한 것을 이기고 만다.물고기는 못을 떠날 수 없으니, 이는 못을 떠나선 필히 말라 죽기 때문이라.

  부드러움은 치국의 근본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부드럽지 아니하면 반드시 멸망하리라. 권모, 형벌 등은 다 흉한 것들이니 백성들에게 베풀 것이 못되느니라. 사물이 극에 다다르면 반드시 되돌아 오는 법이요, 강한 세력은 필히 약해지기 마련이니, 이러한 도리를 깨달아 잘 운용하면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약함이 강함을 능히 이겨내리라.   

 * 채지충 저, 김현진 역, <<노자1>>, 두성, 1991. pp.20~58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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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이란?>

<禮智보다는 德으로>  도덕을 수양하는데는 도, 덕, 인, 의, 예, 지로 나뉜다. 도에 합한 사회는 일체가 자연스러우나, 일단 사회가 '예, 지'로써 속박해야 함에 이르면 거짓이 번성하니 이미 상상키 어려운 때가 되고 만다.

<도의 법칙>  도의 운행은 반복순환되어 쉼없이 돌기에 끊임없는 생명을 낳을 수 있으며, 도의 작용은 부드럽고 낮다. 천하의 만물은 '유'로부터 나온 것이나, '유'란 또한 '무'로부터 생성된 것이다.

  '무'는 도의 본체요, '유'는 도의 쓰임이다. 사람은 응당 무위, 무사, 무지혜, 무지, 무욕, 무아, 무사 하여야만 '도'의 최고 경지에 달할 수 있다.

<도는 만물을 낳는다>  '도'는 만물을 낳는 총체요, 만물생성의 순서는 '도'로부터 나온 일종의 '氣'이다. 이 '기'는 다시 '음', '양' 두 개의 기로 나뉜다. 음기와 양기의 관계는 적당히 고른 상태를 이루니 모든 만물은 이러한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라. 만물이 다 '음'을 업고 '양'을 향하니, 음양이 서로 격하게 흔들려 새로운 조화물을 이룬 것이다.

  '도'가 만물을 낳았으니, 만물이 나온 후에는 도의 정신을 지켜 '도'를 따라 행할 것이요, 응당 부드럽게 자연에 순응할 것이라.

<무위(無爲)의 유익함>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굳은 것을 제어하며, 무형의 힘이 틈도 없는 것을 능히 뚫으니, 난 이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아노라. '무언'의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은 정녕 천하에 비할 만한 것이 없으리라. 물은 가장 부드러운 것임에도 산과 땅을 뚫는다. 이는 부드러움이 굳은 것을 이긴다는 명백한 도리이니라.

<명성과 생명>  명성과 생명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생명과 이득 중 어느 것이 더 귀중한가? 명예를 얻음과 생명을 잃음 중 어느 것이 더 해로운가? 과분하게 명예를 탐하노라면 필히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재물을 너무 많이 간직하면 필히 엄청난 손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만족을 아는 것이 굴욕을 받지 않게 되며, 분수를 아는 것이 위험을 가져오지 아니한다.

  사람은 응당 신체. 생명을 귀히 여기되, 명예. 이익에 과분한 추구를 말지어라. 명예. 이익을 얻고 생명을 잃음은 곧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결과로다.

<만족할 줄을 알라>  천하에 '도'가 있을 때, 사람들은 족함과 그침을 알아 나라와 나라 사이도 화평하여 전쟁이 없으니 전마도 필요가 없어져 밭가는데 쓰였다. 천하에 '도'가 없어지면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며, 이름을 얻으려 다투며, 날 사이엔 전쟁이 끊임없으니, 전쟁터에 내어 써서, 암말은 싸움터에서 새기를 낳을 정도였다.

  천하의 재앙은 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천하의 죄과는 탐욕보다 더 큰 것이 없도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만족이야말로 영원불변한 만족이다. 사람마다 족할 줄 안다면 천하는 태평하리라.

<보지 않아도 안다>  모든 사물의 원리는 닿지 못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 속으로 반성하고 사욕을 없앨 수 있다면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사리를 능히 알며 창밖을 바라보지 않아도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리라. 문밖을 멀리 나설수록 사리를 아는 것이 적어질 것인즉 성인은 멀리 나가 구하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능히 알며, 만물은 베푸어 주지 않아도 자라난다. 마음 깊은 곳은 거울처럼 투명하다. 욕념을 정화하고 마음 속의 장막을 거둬 내 외물을 이해하라.

<도로써 무위에 이른다>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간다. 도를 하면 날로 줄어드니, 줄고 또 줄어 무위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본분을 지켜, 허망된 행위를 않을 수 있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리. 나라를 다스림에도 항시 청정하여 문란치 말되, 번잡. 가혹함에 이르면 다스릴 자격이 없느니라. 학문이란 지식과 욕망을 더해 줄 뿐으로 허위와 번뇌가 가지를 뻗치나, '도'란 욕망을 덜어 내심을 말고 비게하며 외적으론 자연. 무위. 무사케 한다.

<성인의 마음>  성인에겐 정견이 없어 백성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으로 삼는다. 선량한 자를 선하게 대하고, 선량치 못한 자라도 선하게 대해 모든 자가 선해지도록 한다. 믿음성 있는 자를 선하게 대하고 믿음성 없는 자라도 선하게 대해 모두가 믿음을 지키게 한다. 성인이 재위하여 자기 의욕을 거두고 백성들 마음을 검소하게 하니, 모두들 어리석도록 이목을 집중한다. 이에 성인은 그들을 갓난아이를 대하듯 돌본다. 이상적 지배자는 자신의 의욕을 거두어 주관적 표준을 삼지 않되, 응당 善과 誠의 마음으로써 모든 백성을 대해야 하리.

<생과 사>  우리 일상생활에는 무형의 코뿔소, 호랑이, 무장병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로써 명성, 색욕, 이득, 교만, 사치, 음란, 아니일, 방종... 이들 중 하나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화를 일으키게 되나, 마음을 가다듬고 언행을 삼가며 승리를 탐하지 않으면 해를 받지 않으리라.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지자는 도의 오묘함을 알기에 신중히 행하며 많은 말을 삼간다. 종일 지껄이는 자는 아예 '도'를 모르는 자로다. 날카로움을 감추고 분란을 해소하며, 빛을 머금어 티끌과 함께 하니, 이야말로 깊고 현묘한 하나의 경지로다. 세속을 떠난 초연함으로 담백무욕하니, 그와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고, 그에게 이득을 줄 수도 해를 줄소도 없으며, 그를 고귀하게도 비천하게도 못한다.

   이러한 경지까지 수양을 쌓은 자야말로 천하의 가장 위대한 존재로다. 이상적 인격 형태는 재주를 참고, 얽힘을 풀며, 빛을 고르게 하여, 티끌과 함께 함으로써 한몸을 이루는 최고 경지에 달하는 것이다.

<正道로써 다스리라>

<정치는 생선요리와 같다>

<강과 바다는 계곡의 왕이다>

<진정한 선비>

<최상의 앎>

<용감한 생사>

<생존은 곧 부드러움이다>

<물의 성질>

<원한>

<진실과 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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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다스리는 글>

  福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德은 겸양에서 생기며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 데서 생기느니라.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고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하는 데서 생기느니라.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입을 조심하여 실없는 말을 하지 말고 착한 말 바른 말 부드럽고 고운 말을 언제나 할 것이며, 몸을 조심하여 나쁜 친구들을 사귀지 말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

  어른을 공경하고 덕있는 이를 받들며 지혜로운 이를 따르고 모르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라. 오는 것을 거절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내 몸 대우없음에 바라지 말고 일이 지나갔음에 원망하지 말라. 남을 해하면 마침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災禍가 따르느니라.
  이 글을 읽고 낱낱이 깊이 새겨서 다 같이 영원을 살아갈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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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語-學而篇>

   논어 학이편은 공자의 교육사상을 밝힌 것으로 덕을 근본으로 한 지식을 중시하고 있다.  

  [孝弟] 有子曰...其爲人也孝弟요, 而好犯上者鮮矣니.

            不好犯上, 而好作亂者는, 未之有也니라.

            君子務本이니, 本立而道生이니라.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

          * 부모께 잘하는 것을 孝, 웃 형제에게 잘하는 것을 弟라 함.

"有若(공자의 제자) 왈... 부모께 효도하고 형을 존경하는 자가 웃어른을 침범하는 예는 극히 드물고, 웃어른을 침범하지 않는 자가 어지럽히는 일은 없더라. 군자는 근본에서 일하니, 근본이 세워지면 그로부터 道理가 생긴다. 부모께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이 두 도리가 곧 仁의 근본이로다"

 
  [治國] 子曰...道千乘之國하되, 敬事而信하고,
       
            節用而愛人하며, 使民以時니라.

"공자 왈...천대의 병차를 낼 수 있는 나라를 다스림에는 정사를 신중히 처리하여 백성의 신임을 얻으며, 절약하여 쓰고 백성을 사랑할 것이요, 백성을 부릴 때에는 한가할 때로 맞추는 것이 가장 좋으니라."

  
  [제자의 도리] 子曰...弟子人則孝하고, 出則弟하며, 謹而信하여,

            汎愛衆하되 而親人하라. 行有餘力이거던 則以學文이니라.

"공자 왈...배우는 자는 집에서 부모께 효도하고, 밖에서 어른께 공경하며, 일에 신중하고 마에 미더우며 더욱이, 여러 사람을 넓게 사랑하여 인덕있는 이와 가까이 할지라. 이런 덕행을 실행하는 것 외에 또한 공부에 열중할 것이니라.

  
  [군자의 도리] 子曰...君子不重이면 則不威하니, 學則不固니라.

           主忠信하고, 無友不如己者요, 過則勿憚改니라.

"공자 왈...군자로서 무게가 없어 존경을 못 받으면, 배워 얻은 것도 튼튼하지 못하다. 도덕과 학식이 나보다 못한 자와 사귀지 말며 나에게 허물을 발견했거든 꺼리지 말고 고쳐라."

  
  [돈후한 민심]  曾子曰...憤終追遠이며, 民德歸厚矣리라.

"증자 왈...우리가 부모의 喪을 신중히 모시고 조상의 제사를 잊지 않는다면, 민심이 자연 돈후하게 되리라."
--죽은 자에 대한 예를 다함은 곧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이미 죽은 조상을 잊지 않는 자는 산 가족에 있어 효를 더욱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온 사회의 풍속과 온 백성의 도덕심이 두터워지는 것이다.

  
  [知己]  子曰...不患人之不己知요, 患不知人也니라.

"공자 왈...남들이 나의 장점을 알지 못한다 근심 말고, 내가 남의 장점을 모를까 근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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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語 爲政篇>

  [덕치]  子曰 道之以政하고, 齊之以刑하면,民免而無恥니라.

             道之以德하고, 齊之以禮면, 有恥且格이니라.

"공자 왈...백성을 법령으로써 영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두려움에 못된 짓을 하지 못하나 형벌을 피하는 것일 뿐 염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도덕으로써 감화하고 예절로서 다스리면 백성들에게 염치가 있어 선하게 개과될 수 있다."

  
  [효도]  子游問孝하니, 子曰...今之孝者는 是謂能養이니, 至於犬馬도

             皆能有養이라. 不敬이면, 何以別乎아?

"자유가 공자께 효도를 물었다. 공자 왈...대개들 효란 부모를 공양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더라만, 사람들이 개, 말도 먹이는데, 먹일 뿐 존경하지 않으면 부모를 먹임과 개, 말을 먹임에 다를게 뭐 있겠는냐?"

  
  [온고이지신]  子曰...溫故而知新이면, 可以爲師矣니라.

"공자 왈...전에 배운 것을 복습하되 늘 새로운 것을 배우면, 가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

  
  [먼저 행하라]
 子貢問君子하니 子曰 先行其言이요, 而後從之니라."

"자공이 공자께 어찌함이 군자인가를 묻자, 공자 왈...군자는 말에 앞서 먼저 행하고 행한 후라야 말하느니라."

  
  [군자와 소인]  
子曰...君子周而不比하고, 小人比而不周니라.

"공자 왈...군자는 넓게 사랑하여 치우치지 않으나, 소인은 치우치고 넓게 사랑하지 않느니라."


  [배움과 사색]
 子曰...學而不思則岡이며, 思而不學則殆니라.

"공자 왈...열심히 배우되 힘써 사색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함이요, 힘써 생각만 할 뿐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의혹으로 흔들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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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의 <道德經>

<道를 읽는 법>

  노자는 자연을 부단히 생겨나고 소멸해가는 비정한 물리적 자연으로서 파악한다. 자연을 변화 속에서 포착하여 사물의 변화에서 일정한 법칙을 발견해 내려고 한다.

  만물의 근원 즉, 우주의 실체를 구성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 그 본체를 그는 '道'라고 이름 지었다. 만물은 流轉한다. 그것이 우주의 운동원칙이며 "道"의 운동형식이다.

  그런데 "도"는 일정한 불변의 것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본래 무한정한 것이기 때문에 無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으나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현상으로서 만물이 있기 때문에 有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양자는 실은 같은 본체에서 나와 있는 것이다.

  無와 有 이 양자의 대립과 轉化를 함축하고 끊임이 없이 운행하는 근원의 작용, 그것은 심오하고 量을 모르기 때문에 '玄'이라고 밖에는 형용할 수가 없다. '현'은 빨간 빛을 띈 黑을 의미한다. 검은 색이지만 순수한 흑이 아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天玄地黃)  그 근원적인 '현'하는 것에서 갖가지 변화와 삼라만상이 나타난다.   

  노자에 의하면 '道'의 법칙성은 인간사회에도 관철되어 있다. 정치나 경제도 이 법칙에 따르는 한 자연히 생생하게 발전하여 그곳에는 인간의 私意나 作爲가 게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위적 규제가 몇 겹으로 가해져 법이 법을 낳아 인간사회를 종횡으로 얽어매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말았다. '작위'를 배척하고 '無爲自然'을 존중하는 노자의 주장은 이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노자>>에는 우리들에게 친근한 명언이 있다.

[道可道非常道]--道라 할 수 있는 道는 영원한 道가 아니다.

  권두의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절대불변의 고정된 도가 아니다. 만물은 잠시도 끊임이 없이 변화를 계속한다. 변화야 말로 우주의 본질이기 때문에 참다운 인식은 사물을 항상 변화 속에서 포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노자철학의 선언에 상당하는 말이다.

[上善若水]--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가 설하는 '不爭의 덕'이 물로 상징되어 있다. 물은 만물을 도와서 생육시켜 주면서도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그 움직임은 무리가 없고 변화에 따라서 끝나는 곳이 없다. 이 물과 같이 사람에게 겸손하여 타인과 다투지 않는 자가 오히려 自在할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다이나믹한 발상이다.

[大道廢 有仁義]--대도가 없어지게 되면 인의가 있게 된다.

  인의라고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은 무위자연의 대도가 무시되어 작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고 부터이다. 이상적인 치세에는 도덕은 필요치 않다. 도덕같은 것은 결국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絶學無憂]--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지식을 만능시하는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크게 허위가 생기게 된 것은 인간의 우두머리가 제멋대로 날뛰었기 때문이라고 노자는 본다.

  "사람들은 들떠고 즐거운 듯 하지만 나는 아직 웃음을 모르는 갓난애와 같이 무심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의욕에 넘쳐 있지만 나는 멍청히 모든 것을 잊고 산다.사람들은 明敏하지만 나는 暗愚하다....정함이 없이 출렁이는 바다. 정처도 없이 부는 바람. 그것이 나의 모습인 것이다." 노자는 의지적으로 이렇게 사는 것으로서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했다.

[道常無爲 而無不爲]--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  

  만물은 스스로 생하고 발전한다. 행위를 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해 낸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知를 가짐으로써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은 또한 그 앎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는 작위하려고 하는 자기 욕망을 지양해서 무위의 경지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德을 읽는 법>

  <<노자>>는 <<도덕경>>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나 이것은 '도'와 '덕'의 2편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2편의 내용이 다를 까닭이 없고 취급하고 있는 주제는 일관되어 있다.

  노자의 철학을 특징 짓는 것은 자연에의 인식과 물질을 생명과 감각을 갖춘 것으로서 파악하는 견해이다. 후자의 견해는 '도'와 '덕'의 관념에 나타나고 있다.

  儒家는 '도'를 오로지 인간의 행위규범의 의미로 사용했으나 노자에게 있어서는 만물의 근원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것은 행위규범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같은 것은 '덕'에도 적용된다. '덕'이란 원래 곧바른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나 유가는 이것에 인격적 품성의 의미를 부여했다. 노자에 있어서의 그것은 물질적 개념이며 동시에 윤리상의 개념이기도 했다.
  '덕'에 나오는 명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大器晩成]

  큰 인물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젊을 때는 재능을 나타내지 않고 남에게 떨어지나 점점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의 비유이다. 원의는 '최상의 큰 그릇은 완전한 그릇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이다.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도'의 위대함을 말한 것.

[大功若拙]--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것과 같다.

  모든 진실한 것은 작위를 버리고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이란 포착하기 어렵다는 비유이다. 대사를 품은 인간이 타인에게 경계당하지 않으려고 더욱 우둔하게 치장하는 경우에도 쓰인다.

[和光同塵]--자기의 지덕을 싸서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일

  끝없이 넓어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모양을 형용.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 먼지와 함께 한다' 어떻게 보면 좋을 것인지 실마리를 주지 않아, 밖에서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도 없는 인물이 보다 위대하다고 노자는 설한다. 대항심을 드러내 놓는 경쟁사회의 비판일 것이다.

[我無爲而民自化]--내가 무위하므로써 백성들은 스스로 교화된다.

  특별히 윤리도덕을 설하지 않아도 자연에 맡겨두면 백성을 감화시킬 수가 있다. 성인의 덕이 광대하다는 것의 비유이다. "무위로 있어도" 라고 말하는 것보다 "무위이기 때문에"만이 백성을 감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뉴앙스이며 '자연스런 지배'의 주장이다.

[治大國 若烹小鮮]--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

  사물을 다스리는 데는 이것 저것 주물러 터트리지 않는다. 마치 작은 생선을 굽는데 손을 대지 않고 굽는 것과 같다는 의미. 무위의 정치 실정을 주장한 말이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상태 그것이 최선의 지배의 실상인 것이다.

[報怨以德]--원한을 덕으로써 갚는다.

  옛 원한에 구애되지 않고 항상 선의를 가지고 타자에 접하는 것. 덕이란 단순한 선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위를 초월한 도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의미를 갖는다. 얄팍한 私意를 초월해서 무궁하게 변화하는 자연의 경여에 합체하라고 말하는 스케일이 큰 발상이다.

[柔之勝剛]--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면 굳센 것이 부드러운 것을 이기고 강한 것은 약한 것에 이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예를 들면 물을 보는 게 좋다. 물같이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세고 강한 것에 대해서 물보다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물이 철저하게 약한 이유밖에 없다.

[小國寡民]--나라는 작고 백성들은 적어야 한다.

노자가 생각하고 그리는 이상향이 집약되어 있다.나라는 작고 인구는 적다. 배에나 수레에도 탈 필요가 없고 무기도 쓸 길이 없다. 글자를 쓰는 것 같은 오만함도 없고 오로지 현재의 생활을 즐기고 이웃 나라와도 단절해서 왕래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향이라고 노자는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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